연중 33주일(평신도 주일) 강론

by 비안네신부 posted Nov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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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우리가 사는 인근에 갑작스러운 확진자로 어수선하고도, 두려운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일주일간 잠시 추이를 보면서, 우리 팔용 가족 여러분들도 영, 육 간에 건강과 평화를 잘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추이를 보면서 상황이 좀 수그러들면 금요일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미사는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큰 전이 없이 잘 정리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어서, 본당 사목회의 강론을 들어야 하지만, 미사가 갑자기 중단한 관계로 제가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라는 세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12,12-13)

 

천주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성령 안에서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 신분은 계급의 높고 낮음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고유 특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는 말씀의 선포와 성무 집행을 통해 신앙의 뿌리를 내리며 신앙인들을 성장시키고 하느님과 신자 사이에 다리가 되어 줍니다. 또 수도자는 청빈과 정결, 순명의 서원을 통해 세상적 가치들을 뛰어넘어 하느님 안에 사는 삶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와는 달리 세상 안에서 가정과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남긴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평신도의 직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본래 현세적 일에 봉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 조건들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 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빛나는 실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교회 헌31)

교회 헌장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평신도들의 특성은 세상 한복판에 사는 것입니다. 자칫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그들을 따라 살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떠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 5,13 이하)의 역할을 하는 것이 평신도들의 삶입니다.

 

대패질하시는 예수님을 그린 성화가 있습니다. 처음 이 성화를 보았을 때 그저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 모습을 담은 성화이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그런 후 다시 이 성화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대패질을 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여러 답변을 상상할 수 있겠지요.

아버지 하느님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계셨을까? 성서 구절을 묵상하고 계셨을까? 열심히 기도에 몰입하고 계셨을까?’ 그것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패질하시는 동안, 보다 나무를 잘 다듬어야 한다는 실제적인 생각이 그 어떤 다른 생각보다도 우선이셨을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시며 대패질을 하셨던 것입니다. “잘 다듬어야 한다.”,“지난번처럼 또 실수하여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면 안 된다.” 우리가 일상 삶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갖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대패질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관한 생각은 잊어버리시고 오로지 세상의 일인 대패질에만 몰두하셨을까? 아마 그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대패질에만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대패질을 하시는 순간은 하느님과 떨어져 세상에 머무르신 것인가? 이 질문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세상의 일에 몰두하여 하느님을 잊어버릴 때 과연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목적으로 세상일에 몰두한다던가 오로지 쾌락을 위해 세상일에 몰두한다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지향이 내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또 그것이 내 존재의 목적과 부합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세상일 자체에 몰두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당신께 주어진 세상일에 최선을 다하셨지만, 그 안에 담긴 욕심은 없으셨습니다. 세상일을 통하여 세상의 어떤 부귀와 영화도 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오늘 당신께 주어진 일상 삶 안에서의 그저 평범한 일에 최선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평신도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에 몰두할 때 그 일 속에 담긴 우리의 지향입니다. 바느질하면서 바느질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바늘에 찔릴 수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공부에 몰두하지 않고 하느님 생각만 한다면 학업이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느질과 공부 그 자체의 지향과 의미를 찾고, 결국은 그 일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 자체를 통하여 하느님과 통교하는 것이며, 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고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을 받은 여러분은 세상일에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하고 또 부여하며 세상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상일을 하면서 식별하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세상일과 다시 말해 구체적인 우리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는 하느님과 분리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하루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과 일 속에 즉 우리의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현존하시며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께서 대패질에 몰두하시는 것이 하느님과의 분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하는 일들과 하느님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세상의 일들과 사건들 안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나자렛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일과 하느님을 가장 완벽하게 통합하시며 일상의 삶을 사셨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사가조차 아무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30세 청년의 삶을 사셨던 그 시간.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별 차이 없을 일상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이고, 또 동네 같은 나이 또래 친구들이 지나가면 반갑게 일상의 대화를 나누시면서 함께 웃기도 하시고 또 때로는 슬픈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때로는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또 우리는 그런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는 성모님의 눈길도 느낄 수 있으며, 또 두 분이 나누시는 대화도 관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와 같이 직업을 갖으셨지요. 어느 날에는 아버지와 함께 만든 창문틀을 들고 주문한 곳에 배달하러 가셨을 것이고, 때로는 주문한 사람의 불평도 들으셨을 것이고 또 물품 대금을 받아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삶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우리의 일상 삶과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면 참 인간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지금 이 시대에 그 같은 공생활 이전의 삶을 사셨다면 평범한 셀러리맨으로 살아가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처럼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드시고 출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만원 버스로 서둘러 가셨을 것이고, 때로는 엄한 직장 상관이 예수께서 만드신 서류를 마음에 안 든다고 집어 던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저녁에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소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공장에서 일하셨든, 건설 현장에서 노동하시었든 또 시골에서 농사일하셨든 30세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 삶 그 자체이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30여 년간을 우리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의 일상의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의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주신 것이며, 또 우리가 참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 가를 몸소 당신의 삶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예수님의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30여 년을 그저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신 그러면서도 하느님과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신 예수님 공생활 이전의 삶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곧 우리 평신도에게 우리의 일상 삶과 세속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가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참된 하느님의 뜻은 이 세상의 우리 일상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일들 그리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어,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세상이 아니라 하나 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패질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일 자체에 최선을 다하시어 생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일에 지향을 갖고 그 일 자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모든 일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들의 직업이나 어떤 중요한 사건이나 일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우리의 삶 전부를 의미합니다. 가정주부로서 가족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하며 도마질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회사의 신입 사원이 하나 가득한 서류를 복사하는 일일 수도 있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또한 청소하는 모습, 운전하는 모습 그리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잘것없이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꼭 자선을 하거나 기도하는 모습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 우리의 모든 행동과 일들이 곧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을 일상의 일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만남 그리고 그 관계에서 또 내가 오늘 접하게 되는 모든 일상의 사건들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이것이 곧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활하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삶들 속에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 나자렛 생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곧 나자렛 예수의 평신도 영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우리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은 몸담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세상 한복판입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고유한 특징인 세상의 복음화에 앞장서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의 삶이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리는 표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건강하게 만나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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