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평화를 전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통해서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게끔, 무엇을 못 보게끔 하려고 하시는 말씀일까?
‘치유를 받고 새롭게 볼 수 있는 자와 원래부터 보고 있던 자들과의 논쟁과 다툼’ 사순 4주일 복음의 줄거리입니다.
우리는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도 옳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은 겉모습에만 치중하여 속마음을 읽는 눈을 멀게 합니다. 부모라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기가 볼 것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모습으로 남을 판단하는 눈은 자신의 흠마저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와 다른, 남을 죄인으로 몹니다.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 사무 16,7)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 보지만 보지 못하게 하는 것에는 '하느님'도, '예수'도 '교회'도 포함됩니다. 이 거룩한 이름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느님 아닌 것을 섬기고, 주님. 주님 하면서도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교회에 모여 기도하면서도 이웃에게서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하느님과 예수님, 그 교회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입니다.
눈 먼 이들은 좀처럼 자기의 눈멂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반항하는 자세를 가집니다.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요한 9,40)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게끔, 무엇을 못 보게끔 하려고 하시는 말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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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부터 미사가 봉헌되어 진다고 교구에서 알려왔습니다. 상황을 더 지켜 봐야겠지만 다시 만나는 날.
지금 머무는 자리에서 귀한 신앙을 잘 지켜 평화를 전달하고 부활을 희망하는 모습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