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깎아 만든, 암벽에 세워진 도시로 페트라라는 뜻은 바위를 뜻한다.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지나 나오는
헬레니즘 양식의 웅대한 건물이다.
건물 정면은 암벽을 파서 만들었고, 암벽을 파서 방도 만들었다.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현대 도시 못지않다.
나바티안이라고 불리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이 유적을 발견하였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유대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갔다고 하여, '무사와디(모세의 계곡)라고 불리우는 곳이고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전세계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마지막 성배’를 이곳에서 찍었고,
198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페트라 이정표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New 7 Wonders of Nature) 재단은 2007년도에선정
▲ 중국의 만리장성 ▲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 ▲ 멕시코 치첸 이차의 마야 유적지
▲ 로마의 콜로세움 ▲ 인도의 타지마할 ▲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를 신 7대 불가사의로 선정, 발표했다.
페트라는 고대도시로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 당하였고
313년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황제에 의해 기독교화 되었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
오벨리스크 무덤(위)과 트리클리니움 무덤(아래)
윗층이 오벨리스크 무덤(이집트)이다. 4개의 피라밋 형태는 4 사람의 무덤을 말한다.
아래층은 로마의 ㄷ자 식탁과 비슷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어 트리클리니움 무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500여개의 무덤들 : 모든 무덤이 일련번호가 매겨저 관리가 된다.
수로
당시 페트라 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사암을 깎아 만들었다.
강수량이 부족하고 물이 없는 페트라가 물 공급을 받을 수 있었던 페트라 도시의 수로 시스템,
인근 1.5km 되는 모세의 샘(와디무사)을 비롯한 샘에서 수로를 연결하여 물 공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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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로 들어가는 폭 2m정도의 좁은 협곡으로 '시크'라 부르며, 그 길이가 약 2km에 달한다.
시크는 물의 침식작용으로 인해서 생긴것이 아니고,
거대한 바위 블록이 지각변동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오랜세월동안 깍여서 부드럽게 된것이다.
사진의 벽면을 보면 시크의 벽면을 따라 수로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크 협곡에서 본 알 카즈네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알 카즈네'는 아랍어로 '보물창고'라는 뜻이며 높이 약25m의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건물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알 카즈네( 보물창고)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 정면에는 높이 약 30m, 너비 약 25m의 파사드가 있고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파사드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알카즈네(보물) 신전 위쪽의 보물항아리
건물 정면 중앙의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의 조각물로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알카즈네(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바위절벽을 깎아 만든 이 조형물은 원래 무덤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 무덤 양식은 당시 유행하던 여러 나라의 양식을 이용하였다.
바로의 궁전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알-다이르 산 페트라 수도원으로 올라 가는 길
내부 벽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 수도원으로 추정하며, 그 부근은 기독교인들이 바위 굴 속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원형극장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로마식 원형극장-2세기초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이 바위산을 깍아 만들었으며6000여명을 수용할수 있다고 한다
무덤 내부에서 보이는 로마 야외 극장.
현지 베두인 마부
페트라 지역은 원래 베두인들이 살았는데 세계문화 유산 등제 이후 새로운 베두인 유입을 막고 있고 있는데.
옛날부터 사는 베두인들만 기거 하며 장사를 한다.
도시의 유적은 요르단의 마안 주(무하파자)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용솟음쳤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밋빛 도시'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던
BC 312년 이전에 도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106년 로마인들이 침입하여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페트라는 로마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 지방에 편입되어 계속 번영했으나 무역로가 바뀌자 상업이 점차 쇠퇴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마침내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영국고고학대학 예루살렘 분교와 미국동양학대학의 조사단은
로마 통치 이전의 페트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출처:브리테니커백과>